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 방송 프로그램은 논란에 휘말리는 일이 많았다. 외국 프로그램을 베꼈다는 의혹이 자주 일었다. 실제 방송국 PD들은 부산으로 종종 향했다. 일본 방송을 구하기 어려워, 일본과 가까운 지역에서 TV 방송을 시청하며 아이디어를 얻었다. 주한미군방송(AFKN)에 빠진 사람들도 많았다. AFKN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미국 드라마, 영화를 종일 들여다보곤 했다. 그만큼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선 해외 콘텐츠가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콘텐츠 시장이 닫혀 있던 시절의 얘기다. 그랬던 한국의 창작자들이 지금은 세계 콘텐츠 시장의 강자가 됐다.
김희경|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중문화 산업 관련 칼럼을 연재 중이다.
콘텐츠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선 K콘텐츠
K콘텐츠는 전 세계인들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일본 넷플릭스엔 한국 드라마가 줄줄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영상온라인서비스(OTT) 콘텐츠 순위를 제공하는 ‘플릭스패트롤’의 집계 결과를 보자. ‘사랑의 불시착’, ‘사이코지만 괜찮아’,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이태원 클라쓰’가 9월 기준 일본 넷플릭스 드라마 1~4위를 차지했다. 9월 7일 첫 방영된 ‘청춘기록’도 8위에 올랐다.
일본 뿐 아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지난 8월 넷플릭스 글로벌 종합 순위 6위에 올랐다. 한국 드라마 사상 최고 순위다. 아시아 7개국에서 1위, 호주 뉴질랜드 등 27개국에서 10위권에 올랐다. 우리가 일상에서 콘텐츠를 통해 느낀 감정을 다른 나라 사람들도 느낀다는 얘기다. 무엇이 한국의 콘텐츠를 세계적 수준으로 만들었을까.
해외 콘텐츠에는 없고 한국 콘텐츠에는 있는 것
‘셜록’ ‘크리미널 마인드’ 등 해외 콘텐츠는 분명히 새로운 자극이 됐다. 1990~2000년대 한국 드라마는 ‘우연성’에 기대는 편이었다. 출생의 비밀, 불치병 등이 불쑥 튀어 나왔다. 지나친 우연성에 지쳐갈 때쯤 접한 해외 콘텐츠들은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했다. 예상치 못한 반전과 정교한 복선은 감탄을 자아냈다. 국내 창작자와 시청자는 그렇게 한 차원 높은 스토리텔링의 세계로 진입했다.
하지만 해외 작품만 봐선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감정’이다. 해외 드라마 대부분은 구성은 탄탄하지만, 캐릭터의 감정선은 단순한 편이다. 선과 악이 대립하는 작품이라면, 악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슬퍼도 기쁠 수 있고, 원망하지만 좋아할 수 있는 내 안의 양가적인 감정까지 발견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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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콘텐츠는 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K콘텐츠는 수천 겹의 감정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인간의 마음 속 소우주를 형상화 하듯 그려낸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다채로운 감정의 진폭을 장르의 결합으로 소화해냈다. 강태(김수현 분)는 자폐를 앓는 형을 늘 챙기지만, 그 무게감에 형을 원망하기도 했다. 문영(서예지 분)은 강인한 척 하지만, 트라우마에 떨기도 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크다. 이들의 복잡한 감정은 때론 호러, 때론 코믹과 로맨스로 그려졌다. ‘사랑의 불시착’의 인기 비결에 대해서도 일본 일간지 아사히신문은 작품 전반에 인간미가 흐른다는 점을 꼽았다. 상큼하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인상적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사람들의 소소한 희로애락으로 표현해 낸 점이 일본 네티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국내 넷플릭스에서 역주행 하고 있는 콘텐츠들도 마찬가지다. ‘나의 아저씨’엔 대기업을 다녔거나, 영화 감독을 하다 ‘망한’ 아저씨들이 나온다. 막막한 현실에 우울해 하다가도 술 한 잔 같이 들이키며 걸쭉한 웃음을 짓는 걸 보면 위로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확산에 지친 마음을 K콘텐츠를 보며 달래고 있는 건 이런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 덕분이 아닐까.
인간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 K콘텐츠
K콘텐츠만의 ‘복합성의 미학’은 한국인이 감정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어쩌다 한국인>을 쓴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람들은 모순되는 감정이나 주장을 쉽게 수용한다. 그래서 좋으면서 싫기도 하고, 기쁘면서 슬플 수 있다.” 어떤 감정도 버리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성향, 나아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발산했던 문화가 콘텐츠에도 반영됐다.
이 감정의 물결이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플랫폼의 영향이 크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는 현재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외국 사람들에게도 실시간 전달될 수 있게 해준다. 콘텐츠가 개별 수출될 때와 달리, 큰 시차 없이 빠르게 다수 국가에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감정의 동시대성’을 보고 느끼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본성에 거울을 비춰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비단 연극 뿐 아니라 드라마 등 모든 콘텐츠가 그렇다. 콘텐츠가 끝나면, 작품이 던지던 질문은 캐릭터에서 나 자신으로 옮겨온다. 나의 삶, 나의 생각을 곱씹게 되는 것이다. K콘텐츠는 이 과정에서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감정까지 이끌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세계 곳곳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커다란 시대의 거울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