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
2021년 대한민국 콘텐츠 시장을 휩쓸었던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에 나온 유행어다. <스우파>는 CJ ENM의 음악 전문 채널 Mnet의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언니들의 춤 싸움’이 펼쳐지자, 당시 시청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큰 호응을 보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년 만에 돌아온 <스우파 2>는 더 거대하고 강력한 댄스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10일 K콘텐츠 경쟁력 분석 업체 굿데이터코퍼레이션에 따르면 <스우파 2>는 TV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화제성 부문 종합 1위에 올랐다. <스우파 2>에 출연한 댄서 바다가 만든 댄스 챌린지 ‘스모크(Smoke)’ 관련 틱톡 영상들의 조회 수는 2억 뷰를 돌파했다.
<스우파> 시리즈가 한국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댄서들의 경쟁과 승부 자체를 뛰어넘어, 춤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재발견하고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선 세 가지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주연과 조연의 자리를 뒤바꾼 ‘역발상’, 이를 통해 새롭게 마련한 ‘기회의 사다리’이다. 한류 열풍과 함께 판을 더 크고 넓게 키운 ‘글로벌’ 전략도 찾아볼 수 있다. 잘 만들어진 하나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시대가 원하고 지향하는 바를 담은 ‘시대의 알레고리(Allegory·은유,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희경|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중문화 산업 관련 칼럼을 연재 중이다.
백댄서? 아니, 무대를 집어삼킨 댄서!
그동안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춤’이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었다. 춤은 그저 노래를 위한 조연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오늘날까지 ‘가수 뒤에서 춤추는 사람’이란 뜻의 ‘백댄서(Backdancer)’라는 용어가 흔하게 사용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스우파> 시리즈는 이 고정된 자리를 전복시키고, 주·조연의 위치를 바꿨다.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엎는 역발상이었다.
댄서들은 그 기회를 당당하게 포착하고 움켜쥐었다.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잘 봐”는 곧 “우리가 보여주겠다”라는 의미다. ‘보여주다’, ‘드러내다’라는 행위엔 그만큼의 자신감이 담겨 있다. 그 자신감의 근원은 스스로 체득하고 쌓아온 경험과 내공에 있다. 게다가 ‘언니들 싸움’이란 표현엔 개인을 떠나 댄서 집단 자체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누구 하나 쉽게 밀리진 않을 것이며, 그래서 더욱 치열한 경쟁이 될 것이란 뜻이다.
서바이벌 형식은 그동안 쌓이고 응축됐던 댄서들의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각 미션이 주어질 때마다 까다로운 조건과 촉박한 시간에도 열심히 아이디어를 모으고 춤을 재차 수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롭고 완벽한 댄스를 선보였다.
사라진 사다리, 여기있었네
<스우파> 시즌 1 방영을 기점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예능 부문에서 명실상부한 주요 장르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쫄깃한 긴장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박진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발견한다는 기쁨과 보람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양한 영역에 걸쳐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K팝 열풍과 함께 <걸스 플래닛>, <보이즈 플래닛>과 같은 아이돌 발굴을 위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쇼미더머니>, <고등래퍼>도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최근엔 <더 지니어스>와 같은 두뇌 서바이벌, <강철부대> 같은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까지 만들어졌다.
이중 <스우파> 등 일부 서바이벌 프로그램엔 차별화 요소가 들어가 있다.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의 장점이 가미된 것이다. 이미 전문가로 인정받은 사람 다수가 포함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비해, 과거 오디션 프로그램은 일반인이 중심으로 진행됐다. Mnet은 1995년 개국한 이래 <슈퍼스타K>를 포함해 다수의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사회적 사다리’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일반인들에게 기회를 주고 재능을 인정해 주는 새로운 사다리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우파> 시리즈 역시 프로 춤꾼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일반 오디션 프로그램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장르 특성상 그에 걸맞은 인정을 못 받거나 대우를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 이들에게 장르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장점을 적극 접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생겨난 기회의 사다리를 보며 시청자들은 더욱 뜨겁게 응원을 보내고 있다.
커진 재미, 다른 재미 선사하는 글로벌 춤판
<스우파 2>에서 글로벌 전략은 결정적인 흥행 비결로 꼽을 수 있다. <스우파 2>는 첫 화부터 진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총 여덟 크루가 이번 시즌에 참여했는데, 지난 시즌과 달리 글로벌 크루들이 포함됐다. 영미권 댄서들의 크루인 잼 리퍼블릭, 일본 댄스 크루 츠바킬이다. 잼 리퍼블릭의 리더 커스틴은 제니퍼 로페즈, 저스틴 비버 등의 작업에 참여했으며, 츠바킬의 리더 아카넨은 자넷 잭슨, 아무로 나미에 등과 함께 했다. 한국 크루와 글로벌 크루는 서로 크게 다른 아이디어와 춤 선(線)을 갖고 있어, 시청자들은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스우파 2>의 글로벌 광폭 행보의 영향으로 새로운 현상도 생겼다. <스우파>의 10대 댄서 버전인 <스트릿댄스 걸스 파이터>의 시즌 2 출연자 모집에 미국, 프랑스, 독일, 브라질, 일본, 중국 등 30여개 국가에서 댄서들이 대거 몰린 것이다. 덕분에 <스우파>에 이어 <스걸파>까지 글로벌 흥행이 점쳐진다.
전 세계가 지켜볼 다음 OOO 싸움은?
<스우파> 시리즈에 이어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은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나온다. 20일 첫 방영되는 Mnet의 <초대형 노래방 서바이벌 VS>이다. 이 프로그램은 노래방에서 끼와 실력을 펼치던 ‘재야의 노래방 고수’들을 발굴한다. 학생부터 모델, 의사, 변호사, 교도관, 매니저, 목수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출연한다. 게다가 노래방에 가면 꼭 불러야 할 인기차트 곡들이 흘러나와 반가움을 더할 예정이다. 전 국민 ‘싱어롱(Sing-along·콘텐츠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름)’ 열풍이 일어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스우파 2>는 첫 화 오프닝에서 다른 프로그램에선 찾아볼 수 없는 원칙들을 제시했다. ‘No Limit, No Respect, No Mercy(제한 없음, 존중 없음, 자비 없음)’이다. 이 원칙 아래 댄서들은 앞뒤 따질 것도 없이, 오직 최고로 멋진 춤을 추겠다는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 안에서 시청자들은 댄서들의 춤에 대한 빛나는 진심과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앞으론 “잘 봐. OOO 싸움이다”라는 말에 ‘언니들’뿐 아니라 보다 다양한 주체들이 들어갈 것 같다. 그리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눈을 또렷이 뜨고 지켜보지 않을까. 격정적이고 뜨겁게 펼쳐질 OOO의 싸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