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로 지난해 연말 극장가를 두드렸던 김종관 감독이 봄의 시작점에서 신작 ‘아무도 없는 곳’을 선보인다. 한층 깊고 사색적으로 변모해가는 김종관 감독의 영화 세계를 확연히 드러내는 이번 작품은 소설가인 주인공 창석(연우진)의 짧은 서울 기행이다. 하루와 이틀, 낮과 밤의 희미한 경계 위에서 도심을 떠도는 소설가의 그림자를 밟으며 따라 나선 길. 관객은 4명의 낯선 얼굴들을 차례로 마주하며 그들 각자의 기구한 사연을 듣는다. 조용히 오가는 말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상실의 흔적들 속에서 슬픔의 심상은 점점 불어나 영화를 뒤덮기에 이른다. 김종관 영화만의 고유한 자리를 분명히 확인하는 경험이 될 ‘아무도 없는 곳’을 소개한다.
김소미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제각기 고유하고 무모한, 영화의 틈새가 궁금하다
상실의 그늘을 걷다
7년 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소설가 창석이 서울로 돌아와 책 출간을 준비 중이다. 창석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따라 챕터별로 전개되는 ‘아무도 없는 곳’에는 차례대로 미영(이지은), 유진(윤혜리), 성하(김상호), 주은(이주영)이라는 이름을 지닌 묘령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종로 지하철 역사 안의 낡은 카페에 앉아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인 미영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다. 창석 앞에 갑자기 나타난 옛 출판사 후배 유진은 창석과 맥주를 마신 뒤 해가 다 지도록 오랜 시간 걸으며 떠나간 연인에 대해 고백한다. 북촌의 한 카페에서 마주친 사진가 성하는 병든 아내를 간병하다말고 어느 스님이 내려준 계시에 몰두 중이다. 늦은 밤, 창석이 만난 바텐더 주은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뒤 손님들의 기억을 대신 사서 시를 짓는 독특한 일과를 꾸려나가고 있다.
네 명의 인물들은 서로 연결점이 없지만, 그들의 사연을 듣는 청자이자 작품의 화자인 창석의 심상은 일관된 형태와 리듬을 유지한다. 요컨대 이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과거의 강렬한 기억 혹은 기억의 부재에 사로 잡힌 채 기꺼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쓰다듬는다. 타인의 죽음을 경험했거나 그 자신이 죽음 가까이에 다녀온 인물들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곱씹으며 현재의 시간에 기꺼이 역행의 날개를 단다.
‘아무도 없는 곳’은 이들의 궤적을 때로는 말로, 때로는 말없는 교감으로 화면에 옮긴다. 대화 혹은 창석의 내레이션이 차분히 착지하는 순간만큼이나 인물들이 서로를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장면의 감흥 역시 생생하다. 아직은 쓸쓸한 이른 봄을 배경으로 영화는 이렇게 기억과 상실,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고독한 여로 위를 떠돈다. 어떤 사색은 차갑고 건조한가하면 김종관의 세계는 정반대에 가깝다. 슬픔은 물론 허무나 실패조차도 가능한 섬세하고 풍요롭게 그리려는 시도 속에서 관객 각자가 자기 안에 새겨진 상실의 흔적들을 감지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다.
김종관 영화의 대화, 그리고 산책
‘더 테이블’(2016), ‘최악의 하루’(2016) 등 거리를 걷고 테이블에 마주앉은 사람들의 대화로 영화의 요체를 구성해 온 김종관 감독의 인장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여전하다. 다만 그 대화가 나아가는 길, 그 대화를 감싸는 시선이 달라졌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페르소나’ 속 단편 ‘밤을 걷다’(2018)에서부터 감지된 밤의 고독, 죽음의 정조가 한층 짙어졌고 성찰의 틈도 넓어졌다. 기이한 것은 슬픔과 동시에 여유와 편안함도 동시에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북쪽으로 가면 귀인을 찾을거라는 스님의 계시를 받고, 아내를 간병하는 와중에 잠시 서울 북쪽 나들이에 나선 성하의 에피소드는 오래된 한 편의 우화처럼 다가온다.
우연히 마주친 자신을 대단한 운명처럼 취급하는 성하 앞에서 창석은 불편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윽고, 아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거라며 청산가리가 든 약병을 내놓았던 성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도 그 모르게 약병을 숨겨버린다. 우연 혹은 운명, 계시 혹은 기적의 유무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성하와 창석의 만남 사이에서 적어도 ‘영화적’이라고 불러 볼만한 신비가 벌어졌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마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처럼, 단순한 에피소드 안에 생의 진리와 슬픔, 뜻밖의 구원이 녹아들어가는 구조가 오랜 여운을 남긴다.
‘아무도 없는 곳’이 주제적 측면에서 깊이를 더해낸 작업이라면, 스타일의 측면에선 한결 자유로워진 태도가 감지된다. 담백하고 미니멀한 감독의 전작과 비교한다면 미장센, 그리고 편집의 측면에서 잉여적인 요소들이 여럿 관찰되는 영화다. 내면의 풍요 혹은 과잉 사이에서 한 작가의 조용한 변화를 헤아려본다. 대화하는 두 사람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화학 작용, 그 격렬한 소용돌이를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내는 김종관 감독의 장악력을 부력 삼아 강물에 몸을 누이는 경험과도 비슷하다. 익숙한 물결의 흐름을 타고 어느새 전혀 모르는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지대를 긍정하거나 혹은 낯설어하거나, 어떤 쪽도 모두 꿈결같기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