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본 잡지에서 본 직업군을 선택할 확률, 교양 작가로서 ‘한국방송작가상’을 수상할 확률, 작가와 잠시 이별하고 공무원이 될 확률, 그리고 오펜 3기 공모에 당선되어 자신이 쓴 단막극이 방영될 확률. 오는 25일 오후 11시 방영 tvN 드라마 스테이지 <빅데이터 연애>의 정희선 작가는 매번 말도 안 되는 확률과의 싸움을 벌이며 그 끝에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는 기적이 이뤄지는 것처럼.
다큐가 세상의 전부였던 그 시절, 그것이 알고 싶다!
정희선 작가는 아직도 드라마 작가라 불리는 게 어색하다. 그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곳이 교양/다큐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SBS 교양국에서 작가를 시작한 그는 이후 <그것이 알고 싶다> <환경의 역습> <긴급출동 SOS 24> 등의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하며 커리어를 쌓았다.
정말 2, 30대는 다큐에 미쳐서 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는 타고난 작가 기질보단 막내부터 시작해 서브, 메인 작가가 될 때까지 한 우물만 우직하게 판 노력파 작가라 말한다. 특히 글은 몸에 붙은 글쓰기의 근육으로 쓴다는 생각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 ‘여간첩 미스터리, 누가 수지김을 죽였나’, ‘빗나간 믿음 자식의 치료를 거부한 부모’ 등 총 54편을 집필했고, SBS 창사특집 3부작 다큐멘터리 <환경의 역습>(2004)도 만들었다. <환경의 역습>은 제17회 한국방송작가상(교양 부문) 수상의 기쁨을 안겨줬다.
다큐도 좋지만 그가 더 좋아하는 건 새로운 도전이었다. 교양 작가로서 빛을 발하던 시기에 그는 서울시장 연설기획 보좌관으로 업을 변경했다. 작가에서 하루아침에 공무원이 된 것. 당시 화들짝 놀랐던 지인들은 3개월 만에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 약 4년 동안 이 일을 계속했다. 이후 전업주부로 살면서 육아에 전념했던 시기를 바탕으로 도서 <자존감을 높이는 엄마의 글쓰기 코칭(공저)>을 출간했고, 현재는 메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전사만 보더라도 드라마 작가에 도전해 오펜 3기에 당선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에게 드라마 작가는 또 다른 도전 중 하나인 셈이니까.
<빅데이터 연애>의 탄생은 책 한 권에서 비롯?
정희선 작가가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던 드라마 작가의 꿈에 도전하고, 오펜을 알게 된 것은 2018년 여름부터다. 당시 그는 선배 작가의 추천으로 드라마 작법 수업을 받았다. 교양 작가로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난생처음 새로운 글쓰기 방법에 놀라웠다고.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드라마 작법 수업 이후 습작을 내야 했던 것. 마침 빅데이터 트렌드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고, 결국 이 소재를 로맨틱 코미디 장르와 연결시켜 이야기를 만들었다.
생애 첫 습작이자 집필작인 <빅데이터 연애>는 빅데이터 맹신론자인 천재 앱 개발자 서준(송재림)이 빅데이터로는 1도 맞지 않는 로맨티스트 여자 빛나(전소민)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본격 디지털 VS 아날로그 대 격돌 로맨틱 코미디다. 당시 초고를 아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줬는데, 재미있다는 피드백에 힘을 내서 퇴고를 할 수 있었다고. 이후 오펜 공모에 내 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출품했다. 출품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드라마로 전향해도 팔릴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 자신의 백그라운드와 무관하게 오롯이 대본으로 평가받고 싶었던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도전이란 배팅을 했고, 당선이란 기쁨을 배로 얻었다.
오펜에 합격하면 창작지원금 5백만원 및 200평 규모의 창작 공간/개인 집필실 제공, 국내 유수 연출자 멘토링, 전문가 특강, 대본 집필을 위한 현장 취재지원 등 다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모두가 ‘드라마 스테이지 2020’ 방영을 보장받지 못한다. 20명의 작가 중 10명에게만 그 행운이 돌아가기 때문. 다행히 정희선 작가의 <빅데이터 연애>가 방송작으로 선정되면서 시청자와 만날 수 있게 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빅데이터 연애> 제작 과정이 시작됐다. 드마라 <오! 나의 귀신님> <어비스>의 주상규 감독과 호흡을 맞추게 된 정희선 작가는 방송용 대본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기존 원고의 통통 튀는 감성을 살짝 누르고 멜로 감성을 높이는 톤으로 수정 방향을 잡았다. 특히 빅데이터가 로맨스의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는 세상에서 사랑의 본질을 짚어보고자 하는 주제의식은 그대로 살리되, 로맨틱 코미디의 가볍고 말랑말랑한 장르에 맛나게 녹이기 위해 수정을 거듭했다. 그렇게 완성된 최종 대본을 넘긴 후, 그는 촬영 현장에도 찾아가 텍스트가 영상으로 구현되는 모습을 두 눈에 담기도 했다고.
그가 대본을 쓰면서 기대했던 동시에 아쉬움을 자아냈던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서로 다른 극과 극인 서준과 빛나의 농구장 첫 데이트 장면이다. 원래 촬영지는 농구장이 아닌 야구장. 데이터와 관련이 깊은 스포츠가 야구라는 점을 반영, 대본에도 야구 경기에 대한 데이터 이야기를 녹여냈다고. 하지만 드라마 촬영이 들어간 시점이 올해 한국시리즈가 끝난 상황이라 농구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로서 아쉬움은 들지만 겨울 스포츠의 꽃 농구장에서 멋들어진(?) 첫 데이트에 첫 키스 장면이 나온다고 귀띔하니 기대 만발!
작가의 자존감을 지키며,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걷다!
오펜 합격 이후, 정희선 작가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오펜 활동을 하면서 라디오 작가를 병행한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 생방송에 참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 오펜에 마련된 개인 집필실에서 주로 생활한다. 좋아하는 지인들과의 모임 등과는 잠시 이별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이곳에서 작업하면서 휴식도 취하고 동기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재미에 빠졌다고. 무엇보다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오롯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이 가장 좋다고 덧붙인다. 여기에 현직 전문가들의 멘토링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현재는 <괜찮아, 사랑이야> <라이브(Live)>의 김규태 감독으로부터 1:1 개인 멘토링을 받고 있는데, 일주일에 두 시간씩, 개인적으로 디벨롭 중인 미니시리즈 작품을 두고 함께 토론하며 부족한 부분을 체크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만족감이 매우 크다고 말한다.
오펜을 통해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경험한 그가 조금이나마 시행착오를 덜 겪은 건 교양 작가 시절 얻었던 노하우 덕분이다. 한 편의 다큐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드라마 트루기 구조를 세우고 그에 맞는 인물과 상황을 찾았던 작업 스타일, PD와의 협업 경험, 완성도를 위한 치열한 설득 과정 등이 드라마 작업 시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특히 평생 평가 받는 일이 작가의 숙명임을 알기에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훈련이 큰 힘이 됐다고.
<빅데이터 연애> 방영을 앞둔 지금, 정희선 작가의 관심사는 미니시리즈 기획안이다. 단막극 집필 이후, 다음 스텝인 미니시리즈 기획안에 주력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라고. 하지만 다큐 경력의 DNA를 바탕으로, 언젠가 사회성 짙은 드라마도 하고 싶다는 포부도 전했다.
드라마 작가는 외로운 직업이지만,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이 작업을 꾸준히 하기 위해 앞으로 더 노력할 예정입니다.
정희선 작가에게 교양 다큐프로그램과 드라마는 재미의 무게감에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는 그릇이라는 점은 같다. 더 나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보고 읽는다. 그리고 필요한 아이템은 노트에 저장해 둔다. 드라마 작가로서 출발한 지 얼마 안됐지만, 그는 이미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오펜을 통해 경험을 쌓았다. 오는 25일 오후 11시 tvN에서 방영하는 <빅데이터 연애>가 그 결과물이자 한해 동안 열심히 노력한 성탄절 선물인 셈. 앞으로 그의 행보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