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평범해서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한 마을. 이곳에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가 오면서, 무채색과 같았던 마을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화려한 일들이 벌어진다. 2019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 *리딩공연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뮤지컬 <노웨어>(NO-W-HERE)의 이야기다. 과연 이 마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작품을 만든 이사랑, 강남 작가, 리카C 작곡가는 나다운 아름다움을 찾는 여정이 펼쳐졌을 거라고 힌트를 줬다.
* 리딩공연: 정식 공연으로 만들어지기 전 가능성을 검증 받기 위해 공연 관계자들과 관객들 앞에서 무대 연출을 최소화한 상태로 음악과 대본에 집중해 공연하는 형태
내가 입을 옷은 내가 정한다?
지난 10월 21일, 월요일임에도 대학로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 근원지는 CJ아지트 대학로. 이날은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 리딩공연으로 선정된 네 작품 중 하나인 뮤지컬 <노웨어>가 첫 선을 보였다. 하루 단 두 차례(16시, 20시) 공연이지만, 자신들의 작품을 공연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던 이사랑, 강남 작가, 리카C 작곡가에게는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노웨어>는 평범한 마을 ‘노웨어’에 스스로 도시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라 소개하는 그녀(이영미)가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마을에 유일한 디자이너가 화마로 죽고, 콜린(권오현)과 아델(정재은)의 결혼식 예복도 없어진 가운데, 그녀가 유일한 희망이 된 셈. 일주일 남은 결혼식을 앞두고 의문의 그녀와 마을 사람들의 동거가 시작되고, 그동안 감춰뒀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한다는 미스터리 구조가 눈에 띈다.
패션 복수극이라는 점에서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영화 <드레스메이커>(2015), 외부인이 찾아와 꿈과 희망을 전하는 부분은 영화 <메리 포핀스>(1963),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과연 이야기의 시작점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입을 옷은 내가 정한다!’라는 ‘나다움’의 정서를 작품에 담고 싶었어요.
– 이사랑 작가 –
뮤지컬 업계에서 PD와 작가를 병행하며 열심히 일해오던 이사랑 작가는 잠시 멈추고 숨 고르기를 할 때쯤,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내가 입고 싶은 걸 입는다!’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10장의 시놉시스를 작성한 후, 대학 동문이자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 조연출, 로 제8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 극본상을 받은 강남 작가, 뮤지컬 <보스리어>를 통해 연을 맺었던 리카C 작곡가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보기로 한 것.
당시 시놉시스를 받은 강남 작가는 옷을 소재로 그녀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일깨워주고 행동하게끔 한다는 이야기와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돋보였다고. 독특한 소재와 보편적인 메시지가 담긴 시놉시스를 발전시키고 싶다는 바람도 가졌다. 외국 유학 생활을 오래했던 리카C 작곡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양성과 이를 인정해보자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았다며 이사랑, 강남 작가의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은 <노웨어>의 그녀?
신인 뮤지컬 창작자들이 가장 바라고 원하는 건 무대 그 자체다. 이들은 텍스트로 풀어낸 이야기와 악보에 수놓은 음악이 연출, 음악, 조명 등 전문 스탭,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과 만나 무대에 선보이는 걸 언제나 꿈꾼다. 이는 전문 인력과의 협업 프로세스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신인 창작자들의 바람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걸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은 신인 창작자들에게 꼭 필요한 지원 사업이다. 2010년부터 진행했던 스테이지업은 뮤지컬 신인 창작자들의 작품 개발 및 시장 진출을 돕고 있다. 2018년 기준으로 96명 신인 창작자의 54개 작품 개발을 지원했으며 2019년 현재까지 뮤지컬 <모비딕> <여신님이 보고계셔> <풍월주> <라스트 로얄 패밀리> 등 총 18개 작품이 스테이지업 리딩공연을 통해 시장에 소개되고 이후 정식 상업 공연으로 시장에 진출하는 등 지속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이들이 스테이지업만을 위해 <노웨어>를 만든 건 아니지만, 이 지원사업을 통해 꿈을 실현하고 싶은 마음이 컸고, 공모 마감일을 D-day로 잡았다. 기간 동안 일주일에 1~2회씩 꾸준히 미팅을 하며 작품 및 캐릭터 콘셉트를 잡는 등 약 6개월 동안 창작 회의를 거듭했다.
이 과정을 통해 완성한 시놉시스 1부(대본 혹은 트리트먼트 1부), 음원 5곡(AR 혹은 MR, 악보필수)을 일정에 맞춰 제출했던 것. 단 한 번의 면접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와 타 작품과의 차별화 포인트가 있어야 했다. <노웨어> 같은 경우에는 블랙 코미디 장르의 이야기와 어울리는 음악에 완성도를 높였던 것. 더불어 대면 면접 시 최대한 이곳에서 많은 걸 배우고 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결과는 합격!
어쩌면 스테이지업은 변화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잘 몰랐던 마을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는 <노웨어>의 ‘그녀’와 같다. 스테이지업은 창작자로서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창작지원금 200만원 지원(작가, 작곡가)도 많은 도움이 됐지만, 가장 좋았던 건 전문가 멘토링과 작품 개발을 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이라 말한다. 대본과 음악에 멘토가 붙어 조언과 수정을 통한 보완 등 전문가에 받는 피드백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노웨어>는 2차 심사인 대본 심사를 거친 후, 지난 8월 리딩공연 우수작으로 선정된 되었다. 이때부터 리딩공연을 위해 연출, 음악감독, 배우들이 섭외되고, 이들과 창작 회의를 하면서 대본을 수정해갔다. 의상, 분장 스탭들의 의견도 들었다. 두 달이란 짧은 시간 동안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단계별로 차근차근 밟아 나가며 조금씩 성장하는 걸 느꼈다고.
사실 신인이기 때문에 한 작품을 완성한다는 건 힘들어요. 하지만 전문가들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고, 관객을 만나 피드백을 듣는 등 교육과 지원, 제작이 병행된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죠.
– 강남 작가 –
뜨거운 가슴, 차가운 시선으로 여는 또 다른 시작
뮤지컬이 좋아 시작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하게 됐다는 이사랑 작가, 연극, 뮤지컬 조연출을 거쳐 작가를 하면서 조금씩 자기 생각을 작품에 담고 있다는 강남 작가, 초등학교 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뮤지컬 작업을 이제야 실현하고 있다는 리카C 작곡가의 말처럼, 세 명 모두에게 <노웨어>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작품을 살짝만 들여다봐도 각자의 의미가 발현되는 지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극 중 ‘그녀’를 만나 누군가를 위해 옷을 만드는 기쁨을 알게 된 소녀 앨리스(서미소)의 모습과 이를 노래로 표현한 뮤지컬 넘버 ‘난 매일 밤’,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이별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콜린과 아델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넘버 ‘고백’, 마을이 규정한 작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그녀’가 준 새로운 신발을 신으며 자신에게 춤추라고 명령하고 싶다는 루이스(허민진)의 이야기 등이 이를 잘 나타낸다.
특히 강남 작가는 루이스의 이야기를 들며 ‘명령’이란 단어가 남에게 하면 억압이지만, 자신에게 하면 자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대사에 담았다고. 리카C 작곡가는 왈츠, 오페라 부파, 팝 등 다양한 음악 구성으로 인물들의 숨겨진 진심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과정을 소개했다.
모든 걸 가졌고 자신만 아는 아델 또한 결핍의 슬픔이 있다는 걸 음악으로서 설득하기 위해 신경을 썼어요. 다행히 그 의미가 잘 발현된 것 같아요.
– 리카C 작곡가 –
이들은 리딩공연이 더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한 방향성을 잡는 기회라 말한다.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피드백을 받고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된 이들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수정에 들어간 상황이다.
이제 차가운 시선으로 냉정하게 작품을 보고 수정 개발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관객의 호흡을 더 듣고 싶기 때문에 셋이 똘똘 뭉쳐 끝까지 초심 잃지 않고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 이사랑, 강남 작가, 리카C 작곡가 –
저마다 마음 한 켠에 있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이사랑, 강남 작가, 리카C 작곡가. 리딩공연을 통해 꿈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한 순조로운 첫 발걸음을 뗐다. 그 시작이 좋은 출발점으로 더 나은 작품을 만드는 자양분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 좋은 작품에서 쭈~욱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