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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블란쳇은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했다. 공식경쟁부문에 오른 상영작 18편을 챙겨보고 수상작을 선정하는 과정만 해도 분명 바빴을 텐데, 그녀는 시간을 쪼개 오리종티 경쟁 부문에서 상영된 그리스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애플’을 관람했다. 상영 이후 그녀와 만난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이 코로나로 전세계 극장 산업이 위축된 상황을 걱정하자, 케이트 블란쳇은 자신이 책임 프로듀서를 맡아 해외 배급과 홍보를 책임질 것을 약속한다. 이 인연은 감독의 차기작 ‘핑거 네일’까지 이어진 상황. 케이트 블란쳇은 ‘애플’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신인감독의 잠재력을 눈치챈 걸까.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독창적인 상상력에서 묻어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흔적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송곳니’ 조감독 출신인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첫 장편 영화 ‘애플’은 기억 상실이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출발한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애플’은 기억 상실을 키워드로 출발한다. 기억을 잃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 되는 이야기는 이미 많았지만,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상상력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기억상실이 마치 감기 같은 유행성 질환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 사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단기 기억상실증이 퍼지고 주인공 알리스(알리스 세르베탈리스)도 자신의 이름과 단순한 사물의 이름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아무도 알리스를 찾지 않고, 그의 기억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병원에서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기억을 만들고, 그래서 다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이 환자로 분류되는 순간부터 각자의 입장과 감정은 주변부로 밀려난다. 사람은 사라지고 환자만 남은 상황에서 의료진에게 중요한 것은 절차와 순서다. 일련의 과정은 치료와 회복 대신 적응을 목표로 삼고, 결국 남은 건 기묘한 실험의 대상이 되어버린 복제품 같은 인간이다. 이처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판타지 세계를 설정하고 천연덕스럽게 블랙코미디를 전개하면서 의미와 상징이 서사의 표면에 스스로 떠오르게 만드는 방식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경영학을 전공한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송곳니’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사람의 얼굴을 화면의 중심에 두고, 말없는 인물의 눈빛에 집중하게 만드는 연출방식도 분명 그의 영화 스승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흔적이다. 디지털이 없는 세상 속 인생 배우기 처방의 오류? 디지털 디바이스 대신 녹음기, 폴라로이드 카메라 등이 사용되는 세상 속 설정이란 점에서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 의식은 돋보인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애플’에서 사라진 것은 또 있다. 영화에서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디지털 디바이스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녹음기, 필름을 집어넣어야 폴라로이드 카메라 같은 아날로그 장비만 남아있는 세계다. 스크린의 형태가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극장뿐. 휴대폰과 SNS가 없는 세상에서 이제 기억은 온전히 인간의 몫이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질문은 비로소 또렷해진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일까. 기억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시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조차 고립된다. 감독은 주변의 모든 것에서 단절된 주인공을 4:3비율의 좁은 화면 속에 가둔다.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서 촬영하는 폴라로이드의 사진 비율 역시 4:3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흥미로운 것은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의 운영 방식이다. 의료진이 제공한 녹음 테이프의 지령에 따라 행동하고, 그 임무 수행의 과정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촬영해서 앨범에 정리해 보고하는 것. 그러면 의료진은 사진을 넘기며 알리스의 일상을 파악하고 그의 상태에 대해 판단하며, 그 과정에서 사생활의 경계는 지워진다. 이 과정에는 기시감이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에서 폴라로이드로 도구가 달라졌을 뿐, 알리스가 반복하는 행동은 우리의 일상 습관과 동일하다. ‘애플’은 이것을 ‘새로운 출발’을 위해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일종의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 처방이라고 짐짓 시치미를 떼지만, 인위적인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기 위한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을 목차로 삼아 일상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삶을 구축해서 결국 나의 기억을 대체하는 일련의 행위는 우리가 SNS에서 삶과 경험을 모방하는 방식과 정확하게 겹쳐진다. ‘애플’이란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영화 속 ‘사과’를 바라보는 알리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어째서 ‘애플’일까. 사과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알리스가 유일하게 맛을 기억하고 있는 대상으로 영화에 여러 번 등장한다. ‘사과가 기억력에 좋다’ 라는 상인의 너스레에 다시 매대에 슬그머니 내려놓는 장면에 이르면 이제 기억과 과거가 없는 새로운 일상에 익숙해진 주인공에게 정체 모를 기억이 도리어 두려운 것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만드는 장치로 사용되기도 한다. 모네가 반복해서 그렸던 사과 혹은 성서의 선악과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 디지털 장비를 생산하는 브랜드를 연상할 수도 있다. 우리의 기억은 이제 데이터가 되었고, 우리의 뇌 대신 클라우드에 저장된다. 기억과 기술이 합쳐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전화번호를 잊고, 어떤 경험의 순간을 잊었으며, 기억은 첨단 기술 디바이스에서 모방과 복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단순한 과거 흔적의 보존이 아니다. 기억의 실체는 거의 언제나 진짜로 발생한 사건의 기록보다는 감정에 가깝고, 그래서 현재와의 관계에서 매번 다시 작성되고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한 번 입력되면 그래도 유지되는 컴퓨터의 메모리와는 달리, 인간의 기억은 마음 속을 떠돌며 흐릿하게 존재하다가 감정과 연결되는 순간에 비로소 기억으로 인식된다. 행동과 경험의 무의미한 축적만 반복되었던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이 놓친 것은 바로 감정이었다. 지령에 따라 행동을 수행하는 인물들 사이에는 사소한 시차만 존재할 뿐, 모방과 복제 사이에는 어떤 의미나 진정성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이 발생하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만 유효한 특별한 경험이 되고, 비로소 기억으로 저장되며 그 기억들이 남들과 다른 진짜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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