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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 <킬링 디어>를 만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는 마치 18세기 영국의 궁정 실내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경험을 안긴다. 아름답고 거대한 바로크 시대의 궁전은 정신을 혼미하게 사로잡고, 인물들은 제각기 불손하고 의뭉스러워서 보는 이의 예측을 손쉽게 가로지른다.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 10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화제작의 위상을 증명하고 있는 <더 페이버릿>. 개봉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작품 속 역사와 감독의 스타일을 정리해본다. 김소미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제각기 고유하고 무모한, 영화의 틈새가 궁금하다 개인과 여성의 자리에서 출발한, 현대적 시대극 제76회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앤 여왕 역의 올리비아 콜맨 (출처: 네이버 영화)  <더 페이버릿>은 1702년에 즉위해 영국 근대사의 개막을 함께했다고 평가 받는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의 집권 초기부터 약 8년간의 일들을 다룬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코틀랜드 통합, 토리당과 휘그당으로 분열된 정당 정치의 대두 등 짧은 시기에 크고 작은 격랑을 쉼 없이 헤쳐온 여왕의 시대다. 앤 여왕에 관한 백과사전 스타일의 설명들을 종합하면, 여왕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최측근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주로 재정부 총재인 고돌핀 백작(제임스 스미스)과 성공적인 전투를 이끌었던 군사령관 말버러 공작(마크 게티스)이다. 하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에서 두 사람은 궁중의 세력가로 잠시 모습을 드러낼 뿐, 거의 그림자에 가깝게 처리된다. 대신 <더 페이버릿>은 앤 여왕의 침소를 휘어잡았던 두 명의 비범한 여성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 데보라 데이비스가 20년 전에 처음 써 내려간 초고 제목은 <힘의 균형>. 처음 우위를 점하는 자는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로, 어린 시절부터 앤 여왕의 절친한 친구였고 말버러 공작과 결혼한 뒤에는 여왕 뒤편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발 늦게 등장한 하녀 애비게일 힐(엠마 스톤)은 사라의 사촌이자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이다. 그녀는 사라가 방심한 사이 앤 여왕의 관심을 가로채고 정치 성향도 바꾸어 놓는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미묘하고 세련된 매력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엠마 스톤(출처: 네이버 영화)  호주 출신의 작가 토니 맥나마라가 시나리오에 참여하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합류하면서 이 이야기는 비로소 <더 페이버릿>으로 완성됐다. 인간의 운명과 삶의 동기를 불온하고 불가해한 것으로 그려내길 즐기는 감독은, 자연스럽게도 <더 페이버릿>에서 유럽 열강을 들썩이게 만든 전쟁이나 영국의 정치적 분열 같은 세상사를 궁정 한편의 벽화쯤인 양 대수롭지 않게 다룬다. 주요 무대를 차지하는 건 거대한 가발을 쓴 귀족들이 오리 경주 시합을 벌이며 낄낄대는 허황한 세계다. 그리고 이들의 무모함, 잔혹함, 그리고 어리석음은 곧 감독 특유의 기이한 에너지로 수렴된다. 혼돈, 무절제, 부조리의 미장센 어안 렌즈로 인해 화면 가운데가 둥글게 휘어지면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런데 이렇게 요약하고 보니 <더 페이버릿>을 이미 수많은 시대극이 즐겨온 궁중 암투 드라마의 예술적 버전 정도로 묘사한 것 같은 아쉬움이 앞선다. 영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형식적 시도를 언급하지 않는 한 <더 페이버릿>은 결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영화다. 때로는 플롯의 세부를 무용하게 할 정도로 야심에 가득 찬 영화적 장치들이 두드러지고, 이런 특징들이 결정적으로 요르고스 란티모스만의 인장을 형성한다. 우선 잦은 풀 숏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화각이 매우 넓은 광각렌즈(어안렌즈), 그리고 카메라를 빠르게 패닝하는 휩 팬(스위시 팬)의 사용이다. 대개 실내에만 머무르는 인물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배경 이미지와 화학작용을 일으키도록 돕는 두 기술 요소는, 프레임 안에 최대한 많은 양의 정보를 담는 동시에 상(像)이 굴절되거나 희미하게 날아가도록 만든다. 사방을 가득 메운 벽화나 장식물의 일부와 다름없는 인간, 혹은 거대한 복도에 버려진 한낱 무상한 인간으로서 앤 여왕과 사라, 그리고 애비게일을 비추는 방식이다. 동시에 이건 역사적 사건 혹은 실존 인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정형성에 굴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선언 혹은 악취미의 발로이기도 하다. 촬영 3주 전부터 배우들과 리허설을 진행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출처: 네이버 영화) 하나의 이미지 위에 다른 이미지를 포개는 이중화면, 즉 오버랩 기법도 주목해야 한다. 앤 여왕, 사라, 애비게일의 관계를 명확한 하나의 관념으로 단정 지을 수 없듯, <더 페이버릿>은 힘의 우위와 균형, 인과 관계가 갖는 혼란을 이미지로 표현한다. 우아한 것과 추악한 것, 엄혹한 비극과 우스꽝스러운 희극, 사랑과 야망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일순 포개지기에 이른다. 세 여성의 얼굴 클로즈업이 겹겹이 한 화면에 쌓이고, 평화로운 오후에 이뤄지는 사교댄스 장면 위로 장총으로 새를 쏘아 죽이는 소리가 겹쳐지는 식이다. 모든 것이 뒤섞여있다는 부조리의 감각은 때때로 시간 순서를 교차시키는 방식 혹은 특정 이미지나 사운드가 불쑥 선행하는 방식으로도 확장된다. 카메라의 각도가 내포하는 교과서적인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낯선 앵글 또한 인상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더 페이버릿>은 스타일의 향연이라 할 만한 영화다. 흘러 넘치는 풍요로운 미장센이 영화적 축복인지 과잉인지는 흥미로운 비평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다만 집요한 기교를 갖춤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진 시대극이라는 사실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극도로 양식적인 세계를 만들어낸 와중에 대체로 자연광과 촛불에 의지해 촬영했다는 사실 또한 빼놓을 수 없이 재미있는 아이러니 중 하나다. 세 배우의 러브스토리만으로도 충분한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과 여왕의 여자 사라(레이첼 와이즈)(출처: 네이버 영화)  러브스토리만의 단순한 낭만성, 그리고 강렬함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 될 수도 있다. 역사책이라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말버러 공작을 위해 앤 여왕이 블렌하임 궁전을 하사했다고 건조하게 적었을 구절도, <더 페이버릿>은 당사자보다 더 들떠 보이는 앤 여왕이 사라에게 눈가리개를 씌운 채 블렌하임 궁전의 모형 앞으로 데려가는 장면을 통해 순진한 감성을 되살린다. 여왕이 사랑하는 17마리의 토끼들을 함께 예뻐해 주는 것이 애비게일이 앤 여왕의 환심을 가로채기 위한 첫 번째 전략이라는 점은 또 어떤가. 이처럼 서로에게 절대적인 관계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란 어쩔 수 없이 귀엽고 짜릿하다. 그래서 <더 페이버릿>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 정서적으로 한결 친밀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세 여성의 삼각 관계를 통해 감정적 동일시가 수월해진 덕분이다. 이 흥미로운 성취에는 세 배우의 매력도 주요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미국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상을 휩쓸고 있는 올리비아 콜맨은 앤 여왕의 불안한 내면은 물론 병든 신체 표현에도 온전한 리얼리티를 불어넣었다. 배우로서 올리비아 콜맨이 이룩한 관록이 곧 여왕의 그것에 일조 했으리라는 사실은 <더 페이버릿>에 관한 가장 쉬운 추측 중 하나다. 레이첼 와이즈의 카리스마와 액션 연기는 한 치의 오차나 흐트러짐이 없고,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타인 엠마 스톤은 이번 영화를 통해 필모그래피 내에서 가장 세련되고 미묘한 연기를 선보인다. 신화(<킬링 디어>)와 우화(<더 랍스터>)를 거쳐 시대극을 손에 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 세계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진화 중이다. 인간을 바라보는 깊이있는 시선과 새로운 표현법을 향한 예술적 야심은 대개 양립하기 어려운 미덕이지만, 란티모스는 그 희박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성큼 나아간다. 빼어난 궤적을 그려온 동시대 감독의 최신작으로서 <더 페이버릿>은 분명 당신의 감각에 오랜 포만감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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