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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원부터 소개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 대상에 몰입하는 이들의 행위에 긍정적인 어감이 더해지면서 세대와 무관하게 거리낌 없이 통용 가능한 일상어가 된 눈치다. 그렇다면 성덕은 무엇일까? ‘성공한 덕후’라는 대답까지는 쉬운 편이다. 하지만 질문은 이어진다. 덕후의 성공은 과연 무엇일까. <성덕>은 소위 ‘성공한 덕후’였던 감독이 ‘오빠의 배신’ 때문에 맞닥뜨린 좌절과 고민의 시간을 유쾌하고 발랄하게 따라가는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오늘도 뜨겁게 사랑 중인 팬들을 위해 영화 <성덕> 메인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잘 생기면 다 오빠’라는 문장은 미디어 산업이 아이돌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멱살 드잡이를 하더라도 상대방의 나이부터 따지는 동방예의지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이와 무관하게 군림할 수 있는 독보적인 존재. 오빠.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남녀 사이에서 ‘오빠’는 가장 정확하게 친밀한 관계(혹은 그 발전 가능성)를 드러내는 호칭이고 ‘잘 생기면 미남’이라는 당연한 논리 대신 ‘오빠’가 대입되면서, 아이돌과 팬 사이의 관계는 오빠와 여동생의 구조로 재편된다. 오빠로 명명된 아이돌에게 숭배와 추앙을 바치는 여동생들. 이제 권력은 완전히 오빠의 손으로 넘어간다. <성덕>의 감독 오세연은 중학교 시절 남다른 팬사랑으로 방송에까지 출연했었다(출처: 네이버 영화) 이 전복된 관계야말로 아이돌을 앞세운 미디어 산업의 근간이 아닐까. 음반 시장 순위를 염려하며 아이돌의 음반을 사들이고, 경쟁적으로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고, 까다로운 팬클럽 가입 절차와 추첨을 통해 간신히 팬미팅에 참석하면서도 진정한 덕후라면 그 과정을 ‘소비’로 인식하지 않는다. 아이돌 산업에서 소비 주체에 해당하는 덕후들은 진작에 기꺼이 왕의 자리를 ‘오빠’에게 내어 주고 수동적인 ‘여동생’의 위치를 차지한다. 대신 수많은 여동생들은 오빠의 눈에 띄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성덕>의 오세연 감독은 오빠의 눈에 띄기 위해 팬미팅마다 한복을 입고 가는 독창적인 전략을 고안했다. 덕분에 오빠는 그녀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게 되었고, 그렇게 그녀는 ‘성공한 덕후’, 성덕이 된다. 어느 날 오빠가 범죄자가 됐다 누군가를 좋아했던 감정과 고민을 마주 보고 있는 오세연 감독(출처: 네이버 영화) 여기까지는 성공 같다. 모름지기 덕후가 꿈꾸는 궁극의 단계는 아이돌과 실제 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과 팬의 관계를 유지하되, 아이돌이 자신을 알아보고 눈인사를 건네고 손을 흔들어주는 – 팬이라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차별화된 독립 존재로 인정받는 것이니까. 그런데 마침 오세연 감독의 오빠가 정준영이라서 이 괴롭고 웃기고 안타까운 다큐멘터리가 시작된다. 게다가 다큐멘터리 조감독의 오빠는 또 하필 승리다. 동병상련의 고통과 슬픔으로 뭉친 이들은 이제 오빠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 보다 정확하게는 오빠를 사랑했던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하고, 답을 얻기 위해 같은 상황에 놓인 수많은 덕후들을 찾아 나선다. 왜 하필 오빠들은 성범죄 관련 범죄자가 되었을까. 아주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오빠로 군림하기 전까지 그들은 대부분 혹독한 연습생 생활을 오래 거쳤고,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성 인지 감수성을 습득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실력과 외모, 마침 운까지 따라서 오빠로 등극한 이후에는 이제껏 한없이 야박하게 굴던 세상이 별안간 쉽고 만만한 것으로 돌변했을 것이고,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를 구분하는 감각은 흐려졌을 것이다. 공모와 위반이 자기 과시의 모험담으로 각색되고 급기야 증거 영상을 공유하는 단계에 이른 다음, 마침내 그들의 아이돌 인생은 파국을 맞이했다. 덕후의 순정은 죄가 없다 영화는 ‘덕질’을 마냥 순수하게 보는 것이 아닌 성숙한 시선으로 바라본다(출처: 네이버 영화) 오빠가 쇠고랑 차고 떠난 뒤, 남겨진 그녀들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배신감을 분노로 치환시켜 이제껏 모았던 음반과 각종 굿즈, 사인본을 모두 폐기하고 더 이상 그의 팬이 아니라고 절연을 선언하는 것. 혹은 한없는 슬픔과 우울 속으로 침잠하는 방법도 있다. 소수이긴 해도 이미 드러난 사실을 부정하면서, 변함없는 애정을 다짐하는 이들도 있다. 오세연 감독은 이 맹목적인 애정을 ‘태극기 부대’가 매주 구치소로 발송하는 엽서와 나란히 배치한다. 격앙된 목소리로, 자조적인 웃음으로, 탄식을 담은 한숨으로 각자의 마음을 털어놓는 그녀들의 고백은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을 거치는 퀴블러 로스의 5단계와 겹쳐진다. <성덕>은 아이돌 산업의 구조와 본질에 질문을 던진다. 덕후들이 추앙했던 오빠는 대형 미디어 산업이 생산한 이미지와 그 복제품에 불과하지만, 그녀들은 그 이미지에 각자 의미와 상징을 부여하고, 그렇게 재생산된 이미지가 다시 소비되는 동안, 그것이 소비의 과정이라는 것을 망각할 만큼 진심과 애정을 쏟았다. 그 몰입의 과정은 때로는 위안이었을 것이고,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며, 자주 쾌락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진심은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다(출처: 네이버 영화) <성덕>은 믿었던 오빠에게 배신당한 덕후들의 분노와 한탄에 멈추지 않고, 미디어 산업의 적극적인 소비 주체로서, 놀이 문화를 구성하는 한 축으로 덕후들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그들의 권리와 영역을 정의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오빠님이 출소한 다음에 꼭 <성덕>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가 누렸던 것이 얼마나 과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잃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1999년생 오세연 감독은 자전적 이야기에서 출발해 이번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성덕’은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제25회 우디네극동영화제 비경쟁 부문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초청받아 상영되었으며, 제23회 부산독립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오는 9월 28일 개봉해 전국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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