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하우스 칼럼] 니콜라스 케이지가 돼지를 찾는 이유는? ‘피그’

니콜라스 케이지의 필모그래피는 무려 105편에 이른다. 할리우드에서도 단연 다작배우로 손 꼽힐 만하다. 그러나 출연작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배우의 속셈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작품의 주/조연을 거쳐 마침내 1996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로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석권하기 무섭게, 그는 ‘더 록’, ‘콘 에어’, ‘페이스 오프’ 같은 대형 액션 블록버스터에 연달아 출연한다. 여기에 첩보, B급, 재난, 멜로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때로는 ‘망작’에 이름을 올리고 때로는 성공한 시리즈물로 건재를 과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출연작 보다는 사생활이 더 부각되었고, 재기를 꿈꾸기에는 시간이 너무 흐른 것처럼 보였다. 그랬던 그가 영화 ‘피그’를 통해 말없는 숲 속의 은둔자로 돌아왔다. 액션 스타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낸 니콜라스 케이지는 자신의 연기 인생을 통틀어 단연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옥미나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사진

옥미나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영화로 사람과 세상에 대해 배우고 있지만, 갈 길이 멉니다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별로 많지 않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피그' 국내 포스터로, 수염이 난 니콜라스 케이지의 옆모습과 하단에 영화 제목인 '피그'가 삽입되어 있다.
개봉 전부터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을 전한 니콜라스 케이지의 ‘피그’ 포스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라디오에서는 음악 대신 해설가의 논평이 흘러나온다. 음악의 요소를 해부하고 해석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은 청취자들에게 직접 음악을 듣고 각자 느끼는 대신, 무엇을 듣고 어떻게 생각해야 마땅할지 사전에 미리 방향을 지시하고 일정한 반응을 유도한다.

요리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난해한 개념과 미사여구를 들먹이면서 식재료와 요리 방법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할수록 이 시대 가장 첨단의 것으로 인식되는 ‘스토리’와 ‘의미’를 부여하는 마케팅 전략은 결과적으로 음악과 음식을 모두 현명한 가치 소비자를 위한 ‘상품’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어쩌면 ‘피그’에 대한 이 리뷰도 결과적으로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된다면 부디 여기서 글을 읽기를 멈추고 개봉날짜에 맞춰 극장에서 먼저 영화를 보기를 권한다.)

오리건주 버려진 땅에서 오막살이를 하는 롭(니콜라스 케이지)는 흙을 헤집고 킁킁대며 땅속에 파묻힌 트러플 버섯을 찾아 그 향을 맡고 있다.
오리건주 버려진 땅에서 오막살이를 하는 롭(니콜라스 케이지)은 흙을 헤집고 킁킁대며 땅속에 파묻힌 트러플 버섯의 위치를 알려주는 돼지와 살고 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라디오를 꺼버리고, 미사여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손가락으로 요리를 짓눌러 그 질감과 강도를 확인하는 롭(니콜라스 케이지)는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별로 많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말없는 은둔자의 짧고 단호한 문장은 힘이 세다.

그는 자신이 만들었던 모든 요리와 그가 맞이했던 모든 손님들을 개별의 경험으로, 고유의 개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요리사다. 그에게 요리는 상품이었던 적이 없고, 그의 식당을 찾아와서 값을 치르고 식사를 했던 이들은 소비자였던 적이 없다. 롭은 투자가치, 유행, 상업성, 대중의 취향 같은 – 사실은 좀 더 쉬운 길을 가고 싶다는 본심을 포장한 채 포기하거나 타협해버린 것들을 일깨우고, 당장의 명예와 이윤, 세간이 평가하는 ‘성공’ 같은 것들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소중한 것을 찾아 떠나는 한 남자의 여정

롭과 그의 유일한 식구인 황금빛 돼지의 모습으로 오두막집 입구에 앉은 롭이 먹을 것을 담은 접시를 가져다 놓고, 돼지가 그 접십에 코를 박고 음식을 먹고 있다.
롭의 유일한 식구인 황금빛 돼지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존재(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롭에게 ‘진짜’는 돼지뿐이다. ‘피그’의 초반, 야밤에 돼지를 강탈당한 그가 도시를 누비며 돼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가 영화에 드러나는 표층 서사의 전부다. 누군가에게는 송로 버섯 채취사업의 필수품인 가축이고, 누군가에게는 잘 훈련된 도구이며, 누군가에게는 베이컨을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이 당연한 ‘돈육’이다. 그러나 롭이 부르면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달려와 접시 위의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작업대 위에서 떨어지는 하얀 밀가루를 연신 털어내면서도 작은 눈을 다정하게 반짝이며 롭을 올려다보았던 돼지는 대체 불가능한 하나의 고유한 존재다. 그리고 그런 대상에게 당연한 감정은 사랑이다.

롭이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첫 번째 상실을 경험한 이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비극을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으로 과장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대신, 정말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삶과 일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털어냈을 것이다.

돼지를 잃어 버린 롭(니콜라스 케이지)가 양쪽에 자동차가 주차된 도로 한 가운데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롭의 돼지가 낯선 이들에게 납치되자, 이를 되찾기 위해 15년 전 떠나온 포틀랜드로 향한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아마 그 무렵부터 롭은 1인칭의 삶을 바라보는 대신, 지구에 인류가 등장한 우주의 수명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깊은 숲속에서 송로 버섯을 채취하고, 물물교환에 가까운 방식으로 판매하면서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에서 오로지 중요한 것에 집중하며 짐작보다 더 긴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롭은 소중한/사랑하는 대상인 돼지를 찾아 떠났던 도시로 돌아온다.

롭이 도시에 입성한 이후에, 비로소 관객들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듣고, 술렁이는 대중의 반응을 통해 그의 과거를 가늠하게 된다. 이름이 환기시키는 그의 능력과 명성, 과거의 인기와 명예, 그러나 이제 당신은 아무 가치도 없다는 적대적인 일갈까지. 영원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인 도시는 롭이 찾는 것을 돌려줄 수 없다. 결국 다시 숲 속 오두막 침대에 롭이 몸을 뉘일 즈음에는 관객들도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세상에 많지 않은데,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많은 것들에 마음을 쏟고 있을까. ‘피그’는 몹시 단순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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