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하우스 칼럼] 노래 하나로 시대의 폭력과 맞선 레이디 데이! ‘빌리 홀리데이’

제78회 골든글로브시상식에서 안드라 데이에게 여우주연상(드라마 부문)을 안겨준 이 작품의 원제는 ‘The United States vs. Billie Holiday’, 직역하자면 ‘미국과 빌리 홀리데이’의 대결쯤 될 것이다. 굴곡진 인생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의 전기영화에는 어째서 이토록 거창한 제목이 붙은 것일까. 리 다니엘스가 감독한 ‘빌리 홀리데이’는 개인의 비극적인 인생과 음악 세계를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노래와 삶에 인종차별과 지난한 투쟁의 역사를 투영하려고 시도한다.

옥미나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사진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로 사람과 세상에 대해 배우고 있지만, 갈 길이 멉니다

빌리 홀리데이가 ‘이상한 열매’를 만났을 때!

영화 '빌리 홀리데이' 영화 스틸로, 빌리 홀리데이 역을 맡은 안드라 데이가 블랙 앤 화이트 드래스와 왼쪽 머리에 꽃 장식을 달고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고, 그 옆에 트럼펫 연주자가 트럼펫을 부르고 있다.
타임지 선정 20세기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는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 이 곡을 부르기 전과 후 빌리 홀리데이의 삶은 큰 변화가 생긴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빌리 홀리데이는 재즈의 황금기이던 1940년대 미국에서 ‘레이디 데이’ 라는 애칭으로 청중의 사랑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재즈 여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녀가 타임지에 최초로 실린 흑인이 된 것은 그녀의 인기나 음악성이 아니라, 그녀가 부른 금단의 노래,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반향 탓이었다.

영화 ‘빌리 홀리데이’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창가를 전전하다 우연한 기회로 재즈의 여왕이 된 그녀의 성공담을 공들여 묘사하는 대신, 파란만장한 유년 시절을 생략하고, 인터뷰 형식을 빌리되 ‘이상한 열매’를 부르기 위해 카페 소사이어티 무대 위에 선 그녀의 결연한 표정으로 시작한다.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학대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1900년대, 미국의 시인 겸 작사가 ‘벨 미어로폴(Abel Meeropol, 1903~1986)’은 우연히 흑인들의 시체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진을 발견하고, 그 충격을 그대로 한 편의 시로 완성한다.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남부의 나무엔 이상한 열매가 열리지요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잎에도 뿌리에도 온통 피범벅

Black body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검은 몸뚱이가 남부의 산들바람에 흔들리죠…

재판장에 선 빌리 홀리데이(안드라 데이)가 경찰들에 이끌려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의 뒤에는 사람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스트레인지 프룻’을 부른 뒤 빌리 홀리데이는 FBI의 집요한 감시와 협박을 받는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남부에서 자행된 흑인 학살의 순간을 묘사한 ‘이상한 열매’는 흑인 민권운동을 위한 대표적인 운동가요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빌리 홀리데이에게 ‘이상한 열매’를 부르는 것은 자신의 명성과 삶을 담보로 삼는 모험이었을 터다. 이 노래가 담긴 홀리데이의 음반은 1939년 한 해에만 100만장 넘게 팔리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안겨주었지만, 빌리 홀리데이는 평생 FBI의 집요한 감시와 협박에 시달리게 된다.

재즈 아티스트가 아닌 흑인 저항가로서의 삶

화장대에 선 빌리 홀리데이(안드라 데이)가 자주색 벨벳 가운을 입고 거울을 쳐다보고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리 다니엘스 감독은 그녀를 재즈 아티스트가 아닌 흑인 저항가로서의 삶을 그리는 데 노력한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최근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작가, 배우, 가수를 아우르는 다양한 여성 아티스트들의 삶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자주 포착된다. 기존의 전기 영화들이 여성 캐릭터의 사적인 영역, 연애와 성공을 묘사하는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녀들이 맞서야 했던 사회와 시대의 억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새롭게 새겨 넣는 작업이 최근 몇 년 간의 미투운동과 맞물려 새로운 여성 서사의 장르가 된 것 같다. 빌리 홀리데이의 삶을 ‘이상한 열매’를 변곡점 삼아 묘사하려는 리 다니엘스 감독의 시도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는 백인들의 억압과 차별에 맞선 역사 흑인 저항가로서 빌리 홀리데이의 삶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재현하려는 거대한 야심에 비해 여성의 삶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그 허점을 자주 드러낸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빌리 홀리데이(안드라 데이)와 붉은색 셔츠를 입은 지미 플랫처(트래반트 로즈)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극 서사의 중심에 서가 된 지미 플랫처와 빌리 홀리데이와의 이야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이를테면 그녀가 함께 했던 남자들로 그녀의 삶을 구분하려는 시도. 마약 중독자였던 첫 번째 남편과 사기꾼에게 휘둘렸던 암울한 시기를 발단으로 삼아, FBI요원이라는 정체를 숨기고 접근했으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지미 플렛처(트래반트 로즈)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을 이루며, 그를 떠난 이후에는 다시 파괴적인 삶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지미 플렛처를 떠난 빌리 홀리데이의 결정은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의 변덕처럼 의문부호로 남겨지고, 그에 비해 그녀를 배신했던 지미 플렛처에게는 고뇌와 죄책감을 토로하면서 합리화의 명분을 얻을 충분한 시간이 배정된다.

빌리 홀리데이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작되었던 인터뷰 형식은 제대로 회수되지 않고, 개연성 없이 나열된 에피소드들은 관객들이 그녀의 번민과 고통에 미처 공감하기도 전에 마약에 의존하며 울부짖는 빌리 홀리데이의 모습만 반복해서 부각시킨다. 빌리 홀리데이에 정통한 재즈팬이라면, 영화에 등장하는 재즈 역사 및 공연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도 눈치챌 것이다. (1947년 5월 27일 필라델피아 얼 극장에서 ‘이상한 과일’을 불러서 홀리데이가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은 완벽한 허구다)

리 다니엘스 감독의 ‘빌리 홀리데이’는 많은 이들에게 이미 친숙한 재즈 싱어의 비극적인 인생을 당대 흑인이 겪어야 했던 핍박과 차별의 결과로 치환하면서 그녀의 삶에 ‘미국과 빌리 홀리데이의 대결’ 이라는 야심만만한 제목을 내세운다. 눈에 띄는 영화적 허구와 상상력 때문에 충실한 전기영화로 분류하긴 어렵지만, 빌리 홀리데이를 그대로 스크린으로 불러온 것 같은 안드라 데이의 목소리에는 분명 매혹될 수도 있을 것이다.

CJ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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