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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배우 전지현씨의 등장을 기대하면 안 된다. 전지현씨의 동생, 혹은 열렬한 팬이 찍은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내언니전지현’은 이 작품을 만든 박윤진 감독의 게임 아이디다. 그 게임이란, 무려 1999년 넥슨에서 나온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 게임 ‘일랜시아’. 2000년대 초반 전성기를 누렸지만, 20여년이 흐른 지금은 게임회사가 서버만 유지한 채 내버려 둔 일명 ‘망겜’이다. 감독을 비롯해 이 고전 게임을 ‘아직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도 의문스러울 터. 그 자신이 ‘일랜시아’ 유저인 ‘내언니전지현’ 역시 그랬다. 그가 ‘왜 이 게임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갖고 카메라를 들었다. ‘일랜시아’라는 대안 세계 오래된 PC의 이미지와 블루스크린의 컬러로 ‘일랜시아’가 얼마나 오래된 게임인지를 잘 보여주는 포스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아주 오래된 옛날, 정령석과 가이아의 도움을 받아 고도의 문명 속에서 살아가던 고대인들의 지구에 카오스가 떨어졌다. 살아남은 소수의 고대인들은 ‘프로토 타입’과 그들 자신의 영력을 모아 ‘일랜시아’를 창조하고 그곳으로 이주한다.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말이다. 이것이 게임 ‘일랜시아’의 시놉시스다. 과연 종말론이 횡행하던 세기말에 출시된 게임답다. 이 대안적 세계 ‘일랜시아’에는 보통의 게임에 있는 ‘레벨’이 없다. 캐릭터는 여러 가지 능력을 스스로 키우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직업을 선택해야 하지만 언제든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까진 흥미가 생긴다. 그런데 당신이 이 게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면, 스크린에 비춰진 게임 화면을 보는 순간 생각보다 더 단순한 그래픽에 당황하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요즘 나오는 다른 게임보다 눈이 덜 아프고 저사양 컴퓨터에서도 실행 가능하다는 것을 게임의 장점으로 드는 유저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10년 넘게 업데이트 한 번 되지 않은 이 게임을 떠나지 않는 진짜 이유일까? 이 게임이 모든 게임 중에 가장 재미없다고 고백하는 유저도 있다. 재미가 없는 게임을 왜 하는가? 어쩌면 ‘일랜시아’의 유저들은 아직 지구가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관계? 왜 아직 ‘일랜시아’를 하느냐는 질문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박윤진 감독은 초등학교 때부터 18년째 이 게임을 하고 있다. 아이디에는 게임 입문 당시 배우 전지현이 영화 ‘엽기적인 그녀’로 톱스타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겨져있지만,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름의 의미 자체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긴 시간 같은 이름으로 게임 속 세계에서 살아온 이들이 아이디라는 제2의 이름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이다. ‘내언니전지현’은 이 게임에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으며, ‘마님은돌쇠만쌀줘’라는 이름의 길드(공동체)의 마스터, 일명 ‘길마’로도 활동하고 있다. ‘내언니전지현’이 온라인 세계의 ‘나’라면, 오프라인 세계의 ‘내언니전지현’인 ‘나(박윤진)’는 대학 영화과 졸업반이다. ‘나’는 졸업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길드원들이 사는 오프라인 주거지를 찾아가 그들이 여전히 이 게임에 머물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 ‘일랜시아’ 공동체의 일원들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분포된 청년 세대로, 대학 졸업반과 사회초년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감독이 게임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제 카메라 앞에서 아바타가 아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게임을 처음 시작한 때와 하지 못하고 그리워했을 때, 다시 시작하게 되었던 때의 상황들을 떠올리며 유년기와 현재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이러한 만남들은 유저들이 게임 속 세계에서 현실의 결핍과 부당함을 보상받고 있다는 공통의 사실을 도출한다. 유저들의 말에 따르면, ‘일랜시아’는 현실과 달리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결과를 보여준다. ’일랜시아’가 현실과 다르다고? 감독은 현실에서 게임세계 속 공동체 구성원을 만나 친밀한 관계를 이어간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일랜시아’가 정의로운 세계’라는 주장에 의문이 들게 된다. 더 이상 운영진이 관리하지 않는 그곳에 법의 위반이 있기 때문이다. 매크로(캐릭터가 특정 행위를 자동으로 반복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가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저들은 원래는 플레이어가 수동으로 해야 하는 행위를 자동으로 하게 만들어 능력치를 올리면서 자신의 ‘시간’을 투자한 것으로 여긴다. 다른 유저에게 돈을 주고 캐릭터를 키우는 유저도 있다. 매크로를 통해 캐릭터를 가장 강하게 키우기 위한 루트 또한 공유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 정보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며, 알아도 따르지 않은 이는 외로울 것이다. 이처럼 자유도가 높아 인기를 끌었던 이 게임에서 모두가 정해진 길로만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게다가 이 상황은 유저들이 말한 현실의 성격을 어느 정도 닮아있다. 말하자면, 대안적 세계가 현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랜시아’가 다른 게임들보다 현실과 가깝게 맞붙어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3D그래픽의 스펙터클이 몰입도를 높이고 수많은 퀘스트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게임은 캐릭터와 현실의 나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일랜시아’에서의 궁핍한 몰입도와 높은 자유도는 이 현실의 연장으로서 게임 속 세계에 접속하게 한다. 역으로, 게임에서 맺은 관계를 오프라인 만남으로 이어가면서 유저들은 현실을 ‘일랜시아’의 연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교란된 세계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일랜시아’의 유저들 사이에는 묘한 자조와 연대감이 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이처럼 ‘일랜시아’는 매크로 문제를 묵인한 채로 유지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단독 위법행위가 이 세계를 위협한다. 특정 캐릭터를 마주치면 게임이 종료되어버리는 버그가 나타난 것이다. 관리자의 조치 없이 정상적인 플레이를 하기가 어려워진 유저들은 저마다 불만을 토로하며 기약 없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던 중 감독이 시정 조치를 요구하기 위해 넥슨 본사를 직접 찾아간다. 과연 관계자를 만날 수 있을까? 이 방치되고 교란된 세계를 다시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방치된 ‘일랜시아’의 미래는?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작품은 올해 6월 뜨거운 관심 속에서 제20회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공개되었는데, 관객석에는 넥슨의 임원진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넥슨 측에서 반응을 보였고, 정식 개봉 버전에는 영화제 공개 이후 진행된 상황들에 대한 영상이 추가되어 재편집 되었다. ‘일랜시아’와 현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이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와 현실 또한 서로의 연장이 된 셈이다. 게임회사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세계들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은가?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게임 유저가 게임의 안팎을 넘나들며 자신이 속한 세계를 담은 국내 최초 다큐멘터리다. ‘일랜시아’라는 유행 지난 게임에 대한 추억 다큐가 될 거란 감독의 예상과 달리, 게임에 관한 유저들과의 대화는 청년 세대가 겪는 현실의 모습을 작품에 담게 되었다. 청년세대가 가진 무기력, 패배감, 자조, 불안, 집착 같은 감정들에 공감한다면, 이 게임을 달리 보게 될 것이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게임에 관한 영화지만 관객이 이것을 통해 접속할 곳은 바로 현실의 이미지다. 영화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소재를 통해 현실을 투과한다는 점에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다큐멘터리 중 한 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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